이스터 섬 (Easter Island)

Published date: 01/13/2023
이스터 섬 (Easter Island)

남태평양에 있는 조그마한 화산섬. 칠레 본토와 3510 km 정도 떨어졌다. 서쪽으로 1921 km 떨어진 영국령 핏케언 제도가 가장 가깝고, 주권국 중에는 그나마 칠레가 가장 가깝다. 가는 방법도 화물선을 얻어타고 가지 않는 이상, 남미로 들어가서 칠레의 산티아고를 통해 비행기 타고 가는 방법밖에 없다. 남미의 허브 공항 중 하나인 산티아고에서 출발하는 게 그나마 저렴하고 편수도 많다. 산티아고와 이스터 섬의 거리는 3,700 km며 비행시간은 6시간이다.

오세아니아 폴리네시아 지역의 동쪽 끝에 있으며 현재는 칠레 발파라이소 주 일라데파스쿠아 현에 속한다. 내부적으로 분리독립 목소리가 있는 곳이다. 실제 면적은 163.6 ㎢로, 서울특별시의 약 1/4 정도 크기며 인구는 2017년 통계에 따르면 약 7,700명. 인구의 약 절반 정도가 원주민으로 분류되고, 스페인어와 라파누이어가 쓰인다.

특산물도 딱히 없고 숲도 없는 황무지에 가까운 태평양의 외딴 섬이지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섬들 곳곳에 몇 미터가 넘는 석상, 모아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걸 보려고 연 10만명 정도의 관광객이 방문한다. 이 모아이를 어떻게 세울 수 있었는가는 아직 여러 가설이 있다.

최초의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이스터섬에 도착한 시기에 대한 추정치는 서기 300년경에서 1200년경까지 학설이 다양하다. 고고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한 최선의 추정치는 서기 1200년경이라는 설이 있다. 원주민들의 정착 초기에는 울창한 숲을 포함한 풍부한 식생과 이를 바탕으로 한 고래잡이, 새잡이, 열매 채취, 제한적 농업까지 이루어지며 발전을 이루었다. 대략적인 계산으로는 정착 전에 야자나무가 1억 그루 가량 있었다고 전해진다.  섬이 고립되어있을 때야 새로 심을 나무를 다른 지역에서 가져올 방법이 없었지만, 인류의 기술이 발달되고 다른 지역과 연결된 이후부터는 당연히 다시 나무를 심기 시작했고, 화학 비료를 이용해서 농사도 짓는다. 오늘날에는 모아이 석상이 있는 거 말고는 웬만한 다른 섬들과 차이가 없다.

이스터 섬은 다른 섬에서 너무 멀리 떨어졌기 때문에 한 차례 '운 좋게' 폴리네시아인들이 도착한 이후로, 1722년 유럽인이 섬에 도착할 때까지 다른 폴리네시아 사회와 지속적으로 교류한 적이 없다고 추측한다. 폴리네시아인들은 카누 항해술이 뛰어나서 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개척하고 서로 교역도 할 수 있었지만, 사방 수천 킬로미터 내에 다른 큰 섬이 하나도 없는 외딴 이스터 섬에 도착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주변에 핏케언 제도, 투아모투-갬비어(Tuamotu-Gambier) 제도, 마르키즈(Marquesas) 제도의 히바오아 섬 등이 있기에 이 섬들을 전진기지삼아 도착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최초의 고대 원주민이 이스터섬에 어떻게 도착할 수 있었는지는 지금도 미스테리다.

이스터 섬에 살던 원주민들이 남미 대륙으로 이동한 때는 1722년 네덜란드인이 도착하기 훨씬 전이라고 유전체 증거로 밝혀졌다. 최신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스터 섬 원주민들이 1300년과 1500년 사이에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접촉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스터섬 원주민과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의 접촉을 보여주는 유전체 데이터 폴리네시아 지역에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자라는 안데스 고구마가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있었다. 때문에 폴리네시아인들과 아메리카 대륙의 교류가 있었음을 추측하고 있었다. 다만 탐험가 토르 헤이에르달의 주장과는 달리 항해기술이 더 뛰어난 폴리네시아인들이 동쪽으로 항해해 남미에 도착했던 것 같다.

1888년 칠레가 이스터 섬을 차지했다. 1953년까지 이스터 섬은 항가로아 마을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칠레에서 특허를 준 회사의 목장이었고, 1966년까지는 칠레 해군이 이스터 섬을 관리했다. 그리고 칠레에서 온 자본가들과 관리자들이 섬 주민의 재산을 거의 모조리 빼앗고 작은 마을들에 몰아 넣었다. 이는 섬 주민들을 저임금 노동자로 부려 먹기 위해서였는데 나중에 20세기 초 언론에서 문제가 되고, 프랑스 핏줄이 섞인 라파누이 원주민들 때문에 프랑스 정부가 문제 삼으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1966년이 되어서야 이스터 섬 주민에게 칠레 시민권이 주어졌으니 그때까지는 칠레 시민으로도 인정도 못 받고 창살 없는 감옥에 산 셈이다. 그 뒤로도 쭉 학교에서 자기 언어도 말하지 못하게 하는 문화 탄압을 받았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의 군사 독재 정권에서는 아예 라파누이어를 금지하려는 시도도 한 번 있었다. 2007년 이스터 섬은 "특별 지역"이 되었다. 환경보호를 위해 관광객은 최대 30일까지만 섬에 체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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