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키니 섬 핵실험

Published date: 05/13/2022
비키니 섬 핵실험

마셜 제도(Marshall Islands)를 이루고 있는 섬들 가운데 하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미국은 이 지역의 모든 원주민을 이주시킨 뒤 1946년부터 1958년까지 핵실험 장소로 사용했다. 최초의 수소폭탄 실험도 이곳에서 이뤄졌으며 총 67회의 핵실험을 하였다.

랄리크 열도(列島)에 속하며 북위 11 °35', 동경 165 °25'에 위치한다. 비키니·에뉴·나무 등 약 20개의 환초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것들에 둘러싸인 초호(礁湖)는 길이 34km, 너비 17km에 달한다. 환상적인 풍경을 자랑하며 유명한 휴양지가 될 수 있었던 이 섬의 운명은 1946년 미국의 원자폭탄 실험으로 한순간에 뒤바뀌게 되었다.

1946년 섬에서 쫓겨나 난민생활을 하던 비키니 원주민들은 1974년 30여년만에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방사능 위험에 대한 논쟁이 격렬했지만, 방사능에 대한 공포보다 고향에 대한 열망이 더 컸던 몇몇 원주민들이 자의로 돌아오는것을 막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방사능이 기준치 이상으로 심각하게 농축되어 있다는 조사 결과가 속속 발표되었고, 결국 비키니 원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4년만에 다시 섬을 떠나야만 했다.

또한 1954년 비키니 섬의 수소폭탄 핵실험 때 발생한 낙진에 노출되었던 론게랍 섬의 주민들도 메자토 섬으로 이주, 이에 따라 미국 정부는 10∼15년 정도의 기간 동안 비키니 섬을 정화해주기로 하고 핵무기 실험으로 야기된 반미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1억 5,000만 달러의 위탁기금을 적립했다.

1989년 미국 대법원에서는 자유연합협정에 의거하여 "마셜 제도의 주민들은 피해보상을 목적으로 미국 정부를 고소할 수 없다" 라는 판결을 내렸지만 1990년 1월에 핵실험에 의한 피해자의 보상 문제를 심의하는 핵손해배상 재판소는 마셜 제도 주민들에 대한 추가 보상을 승인하여 1993년 중반까지 1억 1,200만 달러를 핵실험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으로 지급되었다. 1997년 드디어 첫 안전설이 나온지 30년만에 섬을 거닐어도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연구가 발표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과일은 위험하단 이야기가 있다. 게다가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이 어업활동을 하지 않아 인근 바다는 상어 천지가 되어 해변에 수영하러 가는 건 위험하다고 한다.

여담으로 저기에 보이는 배들은 2차대전이 끝나고 난 후에 항복한 크릭스마리네와 일본 해군의 함선과 쓸모 없어진 미합중국 해군 함선들을 모아둔 것이다.[3] 핵실험 결과 미군은 '핵공격은 생각외로 함대를 전멸시킬 피해를 주지는 못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핵만능주의가 도래하자 핵폭뢰, 핵어뢰, 핵포탄, 핵대함미사일 같은 함선 공격용 핵무기들이 개발 되고 배치되었다.

이때 실험에 끌려나온 전함 중 가장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구 일본군 전함으로서는 전쟁 후 유일한 생존 전함인 전함 나가토. 역시나 전쟁 후 유일한 생존 경순양함인 사카와와 함께 핵을 맞았는데, 둘 다 맞은 당일날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고 나가토의 경우 수주일 뒤 2차 실험에서도 버텼지만 며칠 뒤 침수되어 서서히 침몰했다. 다만 유난히 내구력이 뛰어나서 그런 건 아니고 그나마 나가토가 다른 미군 전함들과 엇비슷한 내구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위 사건이 알려지고 나서 일본에서 반핵운동이 일어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미국이 반핵운동이 반미운동으로 번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경제 발전 지원금이 필요했던 일본 정부와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미국 정부의 책임을 추궁하지 않는다는 약속하에 사건의 매듭을 지었다. 1955년에 200만 달러(당시 약 7억 2000만 엔)이 지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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