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에르토리코

Published date: 01/15/2023
푸에르토리코

푸에르토리코는 영어로 포터리코(Porto Rico) 또는 리치포트(Rich Port)라고 번역되며 '부유한 항구'란 뜻이다. 본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섬 이름을 산후안바우티스타(San Juan Bautista, '세례자 요한')라고 하였고, 중심도시를 푸에르토리코(Ciudad de Puerto Rico)라 하였다.

이곳은 미국의 Unincorporated-Organized Territory, 즉 주로 편입할 생각이 없는 지역 중 하나다. 독자적인 자치의회와 정부수반(지사)을 선출하고 독자적인 사법부를 거느린다. 미국 대통령은 이 지역 지사에 임명장을 주는 역할만을 한다.

1917년 이후로 푸에르토리코는 본토와 마찬가지로 출생한 모든 아이에게 미국 시민권을 부여하고 있다. 따라서 대통령 선거권이 있으나, 선거인단이 배정되어있지 않아 투표는 못 한다. 거주지를 주나 컬럼비아 특별구로 옮기면 투표가 가능하다(마찬가지로 본토 미국인이 여기로 주소를 옮기면 투표권이 봉인된다). 현재는 미국 하원에 발언권만 있고 투표권이 없는 1명의 의원을 보내고 있다. 영문 명칭은 Resident Commissioner of Puerto Rico. 1901년부터 존재했으며, 일반적인 미 연방 하원의원들과 달리 임기가 4년이다.

미국 헌법상 푸에르토리코는 미국 헌법 영토 조항에 따라 미 의회의 총괄적인 권한 아래 있으며, 연방 차원에서 제정된 법률은 정치적 상황과 상관없이 푸에르토리코에 적용된다는 점은 미국의 다른 주들과 같다. 이에 따라 미국 헌법의 상무·외교·영토·민사 조항의 적용을 받는다.

미국에서 피한지로 각광받는다. 카리브 크루즈들은 죄다 코스가 이 섬을 찍고 가는 것이며 이 섬의 산후안에 크루즈선이 기항하면 돈 많은 백인 은퇴 노인들이 호텔 내 카지노에서 돈을 쓰고 간다. 푸에르토리코는 미국인들에게 휴양지로 유명하며 관광업이 발달했다. 기존 산업의 몰락으로 인구 유출이 컸으나 대신 휴양지로의 개발을 택해 1인당 GDP는 남유럽 국가 수준은 되는 것이다.

면적은 9,104km²으로 제주도의 5배 정도 된다. 푸에르토리코를 미국의 한 주로 치면, 면적으로 따졌을 때 48위인 뉴저지의 절반인 49위가 된다. 그 밑에 델라웨어와 로드아일랜드가 있다. 섬 전체가 엘 윤케 산 정상부를 빼면 열대 우림 기후에 속한다. 미국 본토에 없는 열대림 작전환경을 제공해주는 덕분에 미군들이 이 곳에 전지훈련하러 많이 찾아온다. 열대기후로 수도 산후안의 기후는 싱가포르와 동일하게 1년 내내 후덥지근한 날씨를 보인다. 덕분에 미국에서는 겨울이 혹독하게 추운 동북부에서 피한지로서 각광받기도 하고 여름에도 해수욕이나 해양 스포츠 덕에 피서지로도 많이 찾는다.

미국 땅인 만큼 당연히 미군 주둔군이 있다. 미합중국 해군 및 해군에 딸린 미합중국 해병대가 주둔하며 미해병대가 섬을 방어한다. 그리고 이 섬의 최고봉인 피코 데 푼타 델 에스텔이 있는 엘 윤케(El Yunque)산이라는 해발 2000미터의 화산이 있는데 이 산의 푼타 델 에스텔 봉에는 미국 해군의 레이더 기지도 있고 나이트스토커, 델타 포스, 미육군 특전사, 네이비 씰, 해병수색대 포스리컨 등의 미군 특수부대들도 이 곳의 산 속에서 자주 훈련한다. 이 산은 미국 타 지역에 유일하게 없는 열대림이라는 작전환경을 제공해 주는 덕분에 여기만큼 훈련하기 좋은 데가 없다.

1508년 스페인의 후안 폰세 데 레온이 푸에르토리코에 정착촌을 건설하였다. 허나 곧 스페인인들은 이곳에서 소량의 금이 나오는 것 이외엔 별 다른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플랜테이션 농장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물론 원주민들은 플렌테이션 노동에 강제로 동원되어야 했고, 열악한 환경을 이기지 못한 원주민들이 과로와 질병으로 빠르게 죽어나가자 이들을 메우고자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데려오기 시작했다. 곧 푸에르토리코는 연이은 정복전쟁에 있어 물류기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해나가게 되었고 스페인 정부로부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400년간 스페인 제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이 시기 스페인령 푸에르토리코는 포트 리치(Port Rich)라 불리며 신대륙의 귀금속과 물자의 집산지와 중개무역 기지로 전성기를 누렸다.

1879년 노예 제도가 폐지되고 나서는 1897년 스페인이 자치권을 약속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해인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의 결과로 미국에 할양되었다.

미국령이 된 뒤에도 한동안 미국은 이 섬에 관심이 없었다. 원래 미국이 원한 건 플로리다 반도의 부속도서 쿠바를 먹는거였다. 사탕수수를 미국에 수출하고, 플로리다 반도의 부속도서로서 미국 발 밑에 있으며 면적도 꽤 넓은 쿠바와 좁아터지고 대부분 못 쓰는 쓰레기 땅인 이 섬은 비할 바가 아니었다. 푸에르토리코는 너무 좁고 가운데에 떡하니 큰 산인 엘 윤케 산이 있어서 평지도 별로 없었으며 농업 생산량이야 여기도 사탕수수나 바나나 등 플랜테이션이 실시됐으나 같은 미국령이던 필리핀보단 생산량이 낮았다.

이 섬이 카리브 해 교통요지로 쓸모가 있단 걸 알고는 관심을 가지기 시작, 1917년에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에게도 미국 시민권이 주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자치가 실시되어 그들 스스로의 총독을 뽑게 된 것은 1947년에 되어서였다. 그 전까진 생판 모르는 미국인이 총독으로 왔으나 이후에는 푸에르토리코 현지인들이 선거로 현지인을 주지사를 뽑는다. 1950년 미국 의회에서 자치성을 고려해 헌법 제정을 승인하는 법안이 통과되었고, 1952년 7월 25일에 새 헌법이 제정되며 푸에르토리코는 자치령이 되고, 총독은 주지사로 지위가 바뀌었다.

이후 1950년대, 미국 본토로부터의 지원으로 고속도로와 항구 등, 사회기반 시설을 건설하고, 푸에르토리코가 가진 미국 시장의 접근성, 그리고 연방정부가 제공하는 혜택을 최대한 이용하여 경제성장을 하는 전략을 취했다. 이에 각종 소득세, 재산세, 면허세 등을 면제하고, 저임금 인센티브로 미국 회사를 유치하는데 주력하여 1956년에는 제조업 총소득이 농업부문 총소득을 처음으로 앞질렀다. 이후 연방대법원이 설정한 공정근로기준법(Fair labor standard act)을 적용하여 1980년대 초에는 본토인 미국의 최저임금과 동일한 수준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카리브 해 항로의 지리적 이점을 살려 정유산업을 육성하여 중화학 공업으로의 산업 전환을 꾀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중동전쟁으로 인해 촉발된 오일쇼크와 미국의 경기침체로 푸에르토리코는 경제성장이 정체되기 시작했다. 특히 오일쇼크로 인해 발생한 금수조치로 인해 미국의 석유 수입이 줄고, 석유 수요량도 감소한것은 푸에르토리코의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미 본토에 종속된 산업구조로 인해 전통적인 설탕농업, 섬유산업에서도 대량 실업자가 발생했고, 푸에르토리코 정부의 막대한 지방부채는 이미 개별적인 경제정책으로 감당 할 수 있는 수준을 넘었다. 또한 푸에르토리코는 미국 지방채 발행시 면세혜택을 받고, 연방 파산법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본토의 은행, 헤지펀드에서 실 가치에 비해 높은 수준의 투자가 이루어졌는데, 이점이 푸에르토리코가 모라토리움을 선언한 이후 도리어 발목을 잡고 있다.

이후 1980년대와 1990년대 초 미국의 경제 위기로 같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1989년에는 허리케인 휴고가 전 국토를 물바다로 만들어 놓았다. 이러면서 미국본토로 이주가 늘었는데 이 섬 사람들은 미국 시민권자로서 미국 본토와의 왕래가 자유롭기 때문에 그만큼 인구 유출도 많은 편이다.

2017년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푸에르토리코를 매각하는 아이디어를 냈다는 증언이 나왔다. 물론 아이디어로만 그쳤다. 2019년 이후 미 연방정부의 지원과 관광업 장려로 경제가 살아나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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